성경 해설 · 창세기 · 설교 15
감옥에서 꾼 꿈
요셉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창세기 40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꾼 두 꿈은 전혀 다른 미래를 알립니다. 홀트 박사는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요셉의 고백과, 듣기 어려운 소식까지도 감추지 않고 전하는 그의 충실함을 살펴봅니다.
꿈의 해석이 그대로 이루어져도 요셉은 곧바로 풀려나지 않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부탁을 잊고, 기다림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망각이 하나님의 약속까지 지우지는 못합니다. 이 설교는 당장의 형편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판단하지 않도록 격려하며,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된 궁극적인 소망이 그분과 함께 거하는 데 있음을 가르칩니다.
본문: 창세기 40장
이 에피소드는 토비 홀트 박사의 영어 설교를 한국어 청취자를 위해 각색한 것으로, 홀트 박사의 승인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음성 역시 홀트 박사의 승인 아래 본인의 목소리를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한 것이며, 홀트 박사가 한국어로 직접 설교한 실제 녹음이 아닙니다.
챕터
00:00 감옥에 갇힌 요셉
03:46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다
05:26 감옥에 온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09:15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다
12:11 술 맡은 관원장의 꿈
13:12 떡 굽는 관원장의 꿈
14:09 율법과 은혜: 조건부 비교
15:37 두 사람에게 분명히 말한 요셉
17:21 사흘 뒤 이루어진 해석과 잊힌 요셉
20:12 요셉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
22:10 어둠 너머에 있는 소망
챕터
- 0:00 감옥에 갇힌 요셉
- 3:46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다
- 5:26 감옥에 온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 9:16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다
- 12:11 술 맡은 관원장의 꿈
- 13:12 떡 굽는 관원장의 꿈
- 14:09 율법과 은혜: 조건부 비교
- 15:38 두 사람에게 분명히 말한 요셉
- 17:22 사흘 뒤 이루어진 해석과 잊힌 요셉
- 20:13 요셉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
- 22:10 어둠 너머에 있는 소망
원고
Holt: 창세기 40장에서 요셉은 온 이집트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감옥 가운데 하나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죄수 중에는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아주 이상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그 꿈들의 의미와 두 사람의 앞날에 각각 얼마나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친구 요셉보다 더 심한 일을 겪은 사람이 드물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우리가 받은 것을 받을 만한 때도 있습니다. 처지를 돌아보며 모든 일이 이렇게 나빠진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 때가 있죠. 거울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린 선택 때문에 일이 이렇게 엉망이 됐다. 내가 죄를 지었고, 잘못했고, 제 발에 걸려 넘어졌고 온갖 일을 그르쳤다.
잘한 일도 조금은 있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 많은 사람이 그런 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점의 요셉은 자기 죄와 잘못이 너무 심해서 이런 일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37장부터 40장 그리고 그 뒤까지도 요셉은 어둠 속에서 덕과 의로움의 본보기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장이 넘어갈수록 그의 처지는 점점 더 나빠집니다. 전에 말씀드린 일을 다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37장 처음에 요셉과 형제들 그리고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요셉을 사랑했지만 다른 아들들에 대해서는 아마 그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마치 “나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라고 적힌 셔츠를 입고 다닌 셈이지요. 셔츠는 아니고 특별한 겉옷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옷을 입고 다가오는 요셉을 보자 요셉도 미웠고 그 옷도 미웠습니다. 그를 없애고 싶었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를 구덩이에 던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졌지만 거기에 그대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대로 있지는 않았죠. 구덩이에 있을 때는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나빠졌습니다. 바로 그 형제들이 그를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상인들은 그를 어디로 데려갔습니까? 이집트로 데려갔습니다. 요셉으로서는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겠죠. 그렇게 이집트에 간 요셉은 이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는 중요한 사람의 집에서 노예로 일했고 큰 책임도 맡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보디발입니다. 보디발은 이집트의 고위 인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보디발이라는 이름은 태양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그는 이교도였고 그의 집도 이교도의 집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그 집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제 그의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려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자세히 다루지 않았던 39장의 일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마음을 품고 그를 유혹했습니다. 요셉은 올바른 사람이었기에 거절했습니다. 아내는 그가 자기의 접근을 계속 거절하자 화가 났고 요셉이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고 성폭행하려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 듣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줄 알고 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의로운 요셉은 불의한 사람들이 갇히는 곳, 감옥으로 던져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의 짧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감옥은 보통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어떤 감옥인들 좋았겠습니까마는 이곳은 특별히 정치범을 가두는 감옥이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을 집어넣고 문을 잠근 뒤 열쇠를 내던지는 곳이었습니다.
깊고 축축하고 어두운 감옥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요셉에게는 자기 앞날을 몹시 비관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곳에 갇힌 사람의 거의 모두, 말하자면 99.9%는 교수형을 당하거나 감방에서 죽어 그 삶을 마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의 이야기가 그토록 어둡고, 축축하고, 암담하고, 심지어 희망이 없어 보여도 요셉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흥미로운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의 39장에서 처지가 나빠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말을 4번 읽습니다. 4번입니다. 잠깐 살펴보지요. 창세기 39장 2절에는 주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이집트인 주인의 집에서 형통했다고 합니다. 3절에는 주인이 주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고 주님이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21절에는 주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며 간수장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39장 23절에서 간수장은 요셉에게 맡긴 일을 전혀 살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형편은 어두웠습니다. 모든 것이 암담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그런 형편을 잘 아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힘을 얻으십시오. 요셉처럼 여러분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스펄전은 요셉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셉의 삶을 영어 단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친구 요셉의 삶을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37장부터 40장까지 보십시오. 형제들부터 보디발과 보디발의 아내까지 대체로 모두가 그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럼에도 40장에 이르렀을 때 그의 형편은 여전히 나빴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절부터 4절로 돌아가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1절입니다. “그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폭행 혐의로 고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그 안에서 다소 책임 있는 자리까지 맡게 된 뒤입니다. 이집트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자기 주인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무언가 잘못했다는 뜻입니다. 이집트 왕은 두 신하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화가 나서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 요셉이 갇힌 곳에 가두었습니다. 친위대장은 그들을 요셉에게 맡겼고 요셉은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1절부터 4절에는 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술 맡은 자, 곧 왕에게 잔을 올리는 사람과 떡 굽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바로의 노여움을 샀다고 말합니다. 왕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죠.
무언가 잘못했다는 암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범 감옥에 들어갑니다. 친위대장은 두 사람이 단지 술을 맡고 빵을 굽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 분야에서는 최고위 인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누군가 그들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요셉에게 맡긴 사람이 보디발 자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친위대장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39장에서 친위대장 또는 친위대장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 사람이 보디발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기에 감옥에 갇혔을까요? 누구나 궁금해할 것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요? 영어권에는 “범인은 집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술 맡은 자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뒤에 나올 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이집트 전체에서도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왜 그렇게 중요하고 신임받는 자리였을까요? 바로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이 두 사람이 사실상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당시 사람을 암살하는 대표적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독살입니다. 독살이지요. 적에게 독을 써서 제거하는 겁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과학수사도 DNA 검사도 잔에 남은 지문 검사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쓰러뜨린 뒤 들키지 않기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갑자기 쓰러졌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죠. 그러니 독살은 큰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이 바로라면 독을 마시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마실잔을 맡은 사람과 먹을 음식을 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만큼 높은 자리에도 올라갔겠지요.
신뢰받을 뿐 아니라 그 분야에서 실력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아마 아주 훌륭한 제빵사였을 겁니다. 오늘날 유명한 요리사에 빗대볼까요? 음식은 제가 잘 모릅니다만 고든 램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빵사는 아니지만 바로가 고든 램지와 그에 맞먹는 술 맡은 전문가를 감옥에 넣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두 사람은 각 분야의 최고였고 바로가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그들이 바로의 노여움을 산 이유를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바로는 그들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는 일에 연루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수 있죠. 이유가 무엇이든 바로는 그들을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런 일에 죄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무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갈만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1절부터 4절에서 요셉은 고든 램지에 비유할 만한 그 사람들, 곧 두 중요한 인물을 돌보는 일을 맡습니다. 요셉에게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있든 감옥에 있든 나중에 바로 아래서 일하든 윗사람이 그를 높여 권한과 큰 책임을 맡깁니다. 그는 아마 세계 최고의 관리인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서든 탁월한 책임을 부여받는 사람입니다. 이제 5절부터 8절을 보겠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이집트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같은 밤에 각각 꿈을 꾸었습니다. 각자의 꿈에는 저마다 뜻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가보니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요셉은 함께 갇혀있는 바로의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왜 그렇게 슬퍼 보입니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각각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풀이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보통 꿈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요셉이 말했습니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까? 내게 그 꿈을 말해 보십시오.” 깊고 어두운 감옥에 있으면 우울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감옥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이상하지 않죠. 그런데 그 아침에 요셉이 두 사람을 보니 평소보다도 훨씬 더 근심스러워 보였습니다. 아마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겠지만 그날 얼굴에는 특별히 무엇인가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밤에 각각 꾼 꿈이 무척 생생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 꿈이 중요하고 특별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집트의 이교 문화와 종교에서는 사람이 꾸는 꿈마다 어떤 종교적인 뜻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무슨 꿈을 꾸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따져보고 왜 지금 이런 꿈을 꾸었는지 알아내려 했습니다. 내 삶에서 우주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 걸까 하는 식입니다.
사실 그런 관심은 뒤의 여러 세기에도 계속됐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꿈의 중요성과 가치에 관한 책을 한 권 썼지요. 여러분은 자신의 꿈에 얼마나 의미를 두십니까? 제 가족은 제가 꾸는 꿈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잘 압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일어나 “정말 이상한 꿈을 꿨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한 번은 냉장고 안에서 샤워하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제 꿈은 대체로 다 그렇습니다. 전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제가 샐러리를 큰 그릇으로 먹는 꿈을 꾼다면 그 꿈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겁니다. 제가 절대로 샐러리를 먹지 않으니까요. 그건 종말의 환상일 겁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우리의 꿈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꿈을 주시고 그 뜻을 알 지식도 해석자에게 주십니다. 여기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의 꿈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다행히 해석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꿈을 해석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꿈을 들려달라고 합니다. “그 꿈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뜻을 알아봅시다”라는 말이죠. 이제 9절부터 23절을 보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한 번에 두 개씩 나오는 꿈이 세 차례 등장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요셉의 꿈을 기억하십니까? 언젠가 온 가족이 자기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물론 모두 그 꿈을 싫어했습니다. 아버지조차 그 꿈 때문에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두 개의 꿈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다시 두 사람이 두 개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바로가 또 두 개의 꿈을 꿀 것입니다. 이렇게 두 꿈이 되풀이됩니다. 이제 9절부터 19절을 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자기 꿈을 말합니다. “꿈에 내 앞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 가지가 셋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왕에게 포도주를 올리는 사람이지요.
그가 포도나무와 포도 열매 꿈을 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말을 잇습니다. 그 세 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송이마다 익은 포도가 열렸습니다. 그의 손에는 바로의 잔이 있었고 그는 포도를 따서 바로의 잔에 짜 넣고 그 잔을 바로의 손에 올렸습니다. 12절에서 요셉이 그 뜻을 알려줍니다. 가지 셋은 사흘입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그 사람의 머리를 들어 올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예전처럼 바로의 손에 잔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부탁합니다. “형편이 좋아지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게 친절을 베풀어 바로에게 제 이야기를 하고 이곳에서 저를 꺼내 주십시오. 저는 히브리인의 땅에서 끌려왔고 이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16절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옆에 서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사흘 뒤 풀려난다고 합니다.
“좋아! 아주 좋아!”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즉시 요셉에게 말합니다. “나도 꿈을 꾸었습니다. 내 머리 위에 흰 광주리 3개가 있었습니다. 맨 위 광주리에는 바로에게 드릴 온갖 구운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내 머리 위 광주리에서 그것들을 쪼아먹었습니다.” 조금 이상한 꿈이죠? 18절에서 요셉이 대답합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광주리 셋은 사흘입니다.” 앞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흘입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이 사람의 머리도 들어 올릴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앞사람에게 한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앞사람에게는 복직을 뜻한 말이 이 사람에게는 처형을 뜻합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당신의 몸에서 들어올리고 당신을 나무에 매달 것이며 새들이 당신의 살을 쪼아먹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오늘 본문은 두 사람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엾게 여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바로가 변덕스럽게 분노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라면 충동적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뭔가 잘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1절부터 4절은 그들이 중대한 일로 바로의 노여움을 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무슨 죄를 지었다고 가정할 때 이 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두 사람 모두 죄가 있었다면 두 꿈은 율법과 은혜를 보여주는 그림이 됩니다. 율법과 은혜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둘 다 죄가 있는데 한 사람은 자신들에게 권한을 가진 왕의 주권적인 은혜와 자비로 죽음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법을 어긴 자에게 돌아올 벌을 받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또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처럼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사이에도 어떤 주권적인 구별, 주권적인 선택이 나타납니다.
두 사람 모두 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하나는 살아났고 다른 하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다스릴 권한이 있는 왕이 기꺼이 그를 풀어주었기에 죄가 있었어도 다시 높아졌습니다. 본문에는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결과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또한 두 꿈의 결과가 전혀 다른데도 요셉은 두 사람이 그 소식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분명하게 말하려 했다는 점을 보십시오. 첫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요셉이 전한 설교가 그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고 그는 기쁘게 받아들여 감옥을 나가 축하했겠지요. 술 맡은 관원장에게는 좋은 날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습니까? 떡 굽는 관원장에게 요셉이 전한 말은 사흘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가정한 대로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그가 한 일에 따른 결과이지요.
우리는 요셉의 명료함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감옥에 갇혀 있어도 제국 안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압니다. 그래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들을 소식은 이렇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사흘 뒤 바로가 저 사람의 머리를 들어 올리듯 당신의 머리도 들어 올리겠지만 당신은 교수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꿈에서 본 그 새들이 당신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에게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유명한 장로교 목사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전할 설교는 기꺼이 하면서 떡 굽는 관원장에게 전할 설교는 꺼릴까요? 요셉은 결과가 어떻든 분명하고 중요하며 옳은 말,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합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제들에게 말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야 할 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덕 있는 사람이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인 20절부터 23절을 보겠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바로는 자기의 모든 신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잠깐 멈춰 생각해봅시다. 우리처럼 바로도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그토록 오래전에도 사람들이 생일을 기념했다니 재미있죠? 그런데 여기서 다른 점은 왕인 바로가 선물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20절은 그가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왕을 위해 마련한 잔치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는 신하들 앞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불러냈습니다. 본문 표현으로는 두 사람의 머리를 들어 올린 것입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장을 원래 자리로 복직시켰고 그 사람은 다시 바로의 손에 잔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22절을 보면 요셉이 해석한 대로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가장 슬픈 구절에 이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잊어버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했죠. 여러분이 요셉이라면 어느 순간 이제 바로 이때구나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일이 곧 풀릴 것이라는 신호를 너무 일찍 읽은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일이 생겨서 “분명 이것이 내가 바라던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시작이야. 하나님이 이 한 가지 일을 하셨으니 이제 모든 것이 빠르게 잘 될 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마 요셉도 꿈을 해석해준 뒤에 이 술 맡은 관원장은 내게 빚을 졌지 여러 해 동안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이제 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가거든 나를 기억하고 이곳에 그냥 남겨두지 말아달라 나는 무고한 사람이다” 하고 부탁했습니다.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겠죠. 실제로 하나님의 계획에는 좋은 결과가 분명히 있었지만 아직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 상태로 두 해를 더 보내야 했습니다. 어쨌든 20절부터 23절에 나타난 요셉의 해석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사흘 안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밤늦게 텔레비전 전도자의 말을 본 적이 있다면 아니 그건 함정 질문이군요. 그런 방송은 보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런 방송을 본다면 때로는 미래일을 아주 모호하게 예언해서 어떻게든 맞았다고 할 여지를 크게 남기는 것을 보실 겁니다.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말을 사흘이라는 분명한 기한 안에 두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이런 일이, 당신에게는 저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20절부터 23절을 보면 그가 해석한 그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모든 일이 예정된 날에 일어났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라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셋째 날에 바로 앞으로 불려갑니다.
왕의 생일이니 기분도 좋겠죠? 정말 그가 풀려납니다. 머리가 들려 다시 원래 일을 맡고 왕에게 잔을 올립니다. 그는 크게 기뻤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요셉의 부탁을 잊었습니다. 요셉은 다시금 구덩이 같은 곳에 남겨져 기다립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처음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요셉의 전기에 관한 스펄전의 말이 무엇이었죠? 영어로 네 단어, 한국어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 입니다. 그의 형편이 어떻든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요셉이 이때 기대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위해 그의 형편을 세밀하게 빚고 계셨습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살펴볼 이야기를 미리 다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아주 좋게 끝납니다. 그는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가장 큰 권력과 권한이 있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뿐 아니라 형제들, 아버지, 온 집안과 화해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자체를 구하는 일과도 이어집니다. 이보다 더 좋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감옥에서는 그런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지문과 같은 흔적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자기 삶을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흔적은 보인다. 섭리가 보인다. 징표가 보인다. 그것들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분명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믿음으로 걸어오신 분이라면, 머리에 흰머리가 조금 생긴 분이라면 지나온 일을 돌아보며 그 흔적들이 오늘의 좋은 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일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의지 가운데 일어났고 여러분이 오늘 아침 이 자리에 앉아있는 현실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 앞에 어떤 두려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때와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아주 끔찍한 상황을 사용하여 선하고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십니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그를 잊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 좋은 결과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구덩이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고 그와 다른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약속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맺으며 한 가지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닐지라도 어떤 분에게는 지난 12달, 18달, 24달 또는 48달이 정말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지난 1년이나 2년, 3년이나 5년, 아니면 지난 한 주가 어둡고 괴로웠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고 마음에 들지 않고 앞날도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분은 손을 들어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막상 손을 드는 분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면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깊고 어두운 감옥이 요셉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것이 여러분 이야기의 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형편을 통해 여러분을 다듬고 빚어 마침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곳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영광스러운 높은 곳보다 더 좋은 처지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크고 영광스러운 날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오든 오늘 우리 삶이 얼마나 어렵든 내일 무슨 일이 닥치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미래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 미래가 너무도 밝아서 이 힘든 날들은 더는 기억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전의 일은 기억할 만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처지가 어떻든 요셉과 같고 성경에 나오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과 같다면 내일은 분명 더 나을 것입니다. 그 내일이 무엇이든 또 언제 오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