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설 · 창세기 · 설교 16
악의 길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형제들에게 팔려간 요셉이 이제 그들 앞에서 권세를 쥡니다. 그러나 그가 택한 길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였습니다. 창세기 45장에서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홀트 박사는 고난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합니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용서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값을 치르신 은혜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요셉이 가족을 가까이 불러 함께 살기를 원한 장면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려는 복음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안전과 신뢰를 다시 세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본문: 창세기 45장
이 에피소드는 토비 홀트 박사의 영어 설교를 한국어 청취자를 위해 각색한 것으로, 홀트 박사의 승인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음성 역시 홀트 박사의 승인 아래 본인의 목소리를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한 것이며, 홀트 박사가 한국어로 직접 설교한 실제 녹음이 아닙니다.
챕터
00:00 고난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00:27 복수할 이유가 있었던 요셉
01:46 애굽에서 요셉을 높이신 하나님
02:48 형제들을 대신하려는 유다
04:39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운 요셉
06:04 기억하면서도 용서한다는 것
08:17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신 하나님
10:13 화해를 향해 먼저 손 내밀기
11:59 복음이 요구하는 용서
14:37 권세가 있을 때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모형
15:51 가장 악한 일까지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
18:23 가까이 함께 살기를 바라는 요셉의 용서
20:54 용서하시고 함께 거하시려는 하나님
23:1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다른 언어로 듣기
챕터
- 0:00 고난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 0:28 복수할 이유가 있었던 요셉
- 1:47 애굽에서 요셉을 높이신 하나님
- 2:49 형제들을 대신하려는 유다
- 4:40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운 요셉
- 6:05 기억하면서도 용서한다는 것
- 8:18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신 하나님
- 10:13 화해를 향해 먼저 손 내밀기
- 11:59 복음이 요구하는 용서
- 14:37 권세가 있을 때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모형
- 15:51 가장 악한 일까지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
- 18:23 가까이 함께 살기를 바라는 요셉의 용서
- 20:55 용서하시고 함께 거하시려는 하나님
- 23:1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원고
Holt: 여러분은 ‘섭리’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대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좋고 반가운 일을 일으키실 때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상황이 이상적으로 풀릴 때 하나님의 섭리를 떠올리는 겁니다. 하지만 섭리에는 어려움과 가슴 아픈 일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복으로 가는 길에 여러 고난이 놓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창세기 45장에서 형제들을 만나는 요셉만큼 이것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드뭅니다. “복수는 어떻게 할 때 가장 맛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프랑스에서 나온 표현인데 “복수는 차갑게 식혀서 내놓을 때 가장 맛있다”라는 말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차가운 복수를 좋아했나 봅니다. 영화 속 복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리암 니슨이 나오는 영화를 보신 적 있습니까?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 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셉만큼 자신을 해친 사람들에게 복수할 이유가 큰 사람도 그 시대에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르고 의롭게 경건하게 살던 요셉은 보디발과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자신을 팔아넘긴 노예상들에게도, 무엇보다 친형제들에게도 해를 입었습니다. 피붙이에게 받은 상처만큼 영혼 깊이 남는 배신과 아픔은 드뭅니다. 요셉의 끔찍한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마침내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온갖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추락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옷을 입고 언덕에 나타난 그를 형제들이 구덩이에 던져 넣은 순간에 닿습니다. 그 뒤로 몇 주, 몇 달, 몇 년을 살아가며 실은 수십 년 동안 자기 삶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떠올릴 때마다 요셉은 그 한 사건과 그 한 무리의 사람들, 곧 자기 형제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바랐더라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그가 한때 구덩이와 감옥에 갇혀 가장 낮은 곳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보았듯 하나님은 그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시고 더 큰 권한과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마침내 오늘 본문에서 보듯 그는 온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위세를 생각하면 말하자면 온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 된 셈입니다. 이제 요셉이 형제들에게 복수하려 마음먹었다면 무엇이 그를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한 가지 뿐입니다. 형제들이 애굽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멀리 북쪽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형제들이 요셉에게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가 손댈 수 없는 곳에 안전하게 있던 형제들이 제 발로 애굽에 와서 바로 그의 앞에 선다면 말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오래전에 죽은 줄 알고 지금 자신들 앞에 있는 그가 요셉인 줄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 손아귀에 두게 되었다면 요셉에게는 이보다 더 통쾌한 복수의 기회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45장에 앞선 43장과 44장을 보면 요셉에게 복수는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원했다면 형제들을 처음 보자마자 처형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마음먹기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는 다른 일을 했습니다. 형제들을 알아보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신이 기억하는 예전의 형제들과는 달라 보인다는 것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정말 변했는지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여러 차례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바로 앞인 44장 끝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여전히 형제들을 시험하며 아버지와 막내아우 베냐민의 일을 꺼냅니다. 베냐민을 이곳에 남겨두고 아버지에게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바로 그때 형제 중 하나가 나섭니다. “우리는 그 늙으신 아버지에게 야곱에게 다시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에 이미 형제 하나를 잃었습니다.” 요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셉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막내 베냐민마저 잃는다면 베냐민에게도 끔찍한 일이지만 아버지는 슬픔 때문에 죽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형제가 유다입니다. 44장 끝에서 유다는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베냐민 대신 저를 데려가십시오.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는 베냐민에게는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남겠습니다.” 자신이 값을 치르고 종이 될 테니 형제들은 보내주고 아버지가 또다시 비탄에 빠져 죽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이고 희생입니다. 하필 그 형제가 유다라는 점도 눈여겨보십시오.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서 나십니까? 유다 지파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살펴볼 45장 1절과 2절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은 더 이상 옛날 그대로의 형제들이 아닙니다. 공정하게 말하면 요셉도 이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1절과 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셉이 이 일을 눈물로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1절입니다. 요셉은 곁에 서 있는 사람들 앞에서 더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로 “모두 내 앞에서 물러가라!” 하고 외쳤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소리 내어 울었고 그 울음소리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집에서도 들었습니다. 45장 1절에서 이 이야기의 감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유다가 형제, 특히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 전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베냐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유다의 말을 들으니 요셉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들 가운데 누구도 요셉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모든 사람을 내보냅니다.
애굽 사람들도 통역하는 사람도 내보냅니다. 형제들이 그 앞에 왔을 때 서로 다른 언어를 썼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했죠. 당시 그들이 쓰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히브리어와 꼭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그 자리에는 요셉과 형제들만 남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때 자신을 드러냈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에게 직접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입을 연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자신을 밝힙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과거에 받은 상처가 굳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받은 상처일 수도 있고 10년, 20년, 30년 전이나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열린 상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딱딱하게 굳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나 그 일, 그 시절을 떠올릴 때 움찔하지 않기가 어렵고 “그때 내게 그런 일을 한 사람이 누구였지?” 하며 화가 다시 치밀기도 합니다.
요셉은 그 순간 형제들에게 영화 속 복수극처럼 차갑고 철저한 복수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히려 무너집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3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3절에서 요셉이 말합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제 생각에 형제들은 그 뒤의 질문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요셉입니다”라는 첫 마디만 귀에 꽂혔겠죠. 나머지는 만화 ‘찰리 브라운’에 나오는 어른들의 웅얼거림처럼 들렸을 겁니다. 자기네 말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로 “나는 요셉입니다”라고 하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다시 읽으면 “나는 요셉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그 앞에서 놀라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영어성경의 놀랐다는 표현만으로는 히브리어가 전하는 충격이 다 담기지 않습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듯 말도 못하고 턱이 떨어질 만큼 경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다시 말합니다. 4절입니다. “제발 내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 당신들이 애굽에 팔았던 바로 그 요셉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말해야 했던 겁니다.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고 용서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이들이 다툴 때도 그러지요.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방식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이 잊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용서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 나를 해친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해서 그 자체로 하늘나라에서 점수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을 기억하면서도 용서할 때 바로 거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요셉이 “당신들이 애굽에 팔았던 아우 요셉”이라고 한 것은 죄를 들춰 형제들을 짓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생긴 깊은 단절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5절입니다. 형제들이 가까이 왔고 깨졌던 관계가 다시 이어지려는 그때 요셉이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스스로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말하자면 개혁신학자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분명했습니다. 형제들이 한 일이 죄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죄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일 때문에 자신을 원망하며 무너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보내셔서 이제 그 앞에 선 형제들의 생명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벌써 2년이 되었고 앞으로 5년이 더 남았습니다. 요셉이 본 환상에서 흉년은 7년이었지요. 남은 5년 동안에도 밭을 갈거나 추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필요한 식량을 비축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언약의 가족에게 후손이 남게 하시고 큰 구원으로 생명을 지키시려고 먼저 보내신 겁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에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바로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으로 삼으시고 그의 집 전체를 다스리며 온 땅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그 순간 요셉이 날개를 달고 방 안을 날아다녔어도 형제들은 그 말보다 더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그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살아남았으리라 믿기 어려웠겠죠. 그런데 통역도 내보낸 그가 직접 그들에게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형제들 가운데 서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들이 못되게 대하고 노예상에게 팔아넘기고 거의 죽일 뻔했던 형제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고 지금쯤은 원한이 쌓일 대로 쌓였을 그 형제가 바로 앞에서 “내가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형제들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겁에 질리고 경악했습니다. “이제 우리를 죽이겠구나” 하고 생각했겠죠. 요셉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그들을 처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가 해쳤던 그 요셉이라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오래전에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처형을 명하지 않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내게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거듭 부릅니다. 두 팔을 벌려 그들을 맞이하는 듯한 장면입니다. 그 순간 22년 동안 쌓인 아픔과 괴로움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영화 속 복수자처럼 분노를 터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충동이 있었다면 그 자리를 완전히 다른 마음이 차지합니다. 그저 형제들을 되찾고 싶은 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권력도, 지위도, 그가 가진 모든 것도 잠시 잊으십시오.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았을 겁니다.
이제 그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벌어진 틈을 메워야 합니다. 그 틈을 메우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선 사람은 가장 깊이 상처받은 요셉 자신입니다. 여러분도 가까운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나 부모,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계에서 화해를 향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과의 단절을 끝낼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다윗과 압살롬, 바울과 바나바, 탕자와 그 아버지처럼 관계가 갈라진 이야기가 여럿 있습니다. 그때마다 관계를 이어주려면 누군가는 첫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 혹은 두 말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그런 걸음을 내디뎌야 했습니다. 화해하려면 적어도 한 사람은 무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받은 상처와 분노 멍들거나 부서진 관계를 붙들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소식은 상대가 아직 살아 있다면 화해의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시작할 책임이 여러분이나 제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기 싫습니다 라고 말하는 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서나 용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왜입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어떤 해를 끼쳤든 여러분 등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든 여러분에게 저지른 그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지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기꺼이 우리 죄의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차이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죄인의 기도를 했다고? 좋아, 그럼 우리 사이엔 아무 문제 없어” 하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삯이 죽음이라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엇이 따라야 합니까?
죽음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죄를 지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선행의 사다리를 타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로 기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사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갈보리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그분이 치르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되었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용서의 값이 치러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분이 치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함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죄를 하늘나라의 벽장 아래나 양탄자 밑으로 쓸어넣고 “그 일은 다시 이야기하지 말자” 하는 식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죄까지 모두 자기 몸에 지시고 그 죄 하나하나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너는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에는 실질적인 뜻이 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피로 그 용서의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서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제게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요셉에게서 바로 그것을 봅니다. 이 본문에서 요셉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그는 상처와 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큰 권세를 쥐고 상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합니까?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5절에서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셉은 형제들을 가까이 부르며 용서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내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리고 오래전 형제들이 저지른 악행을 하나님의 구속계획 속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당신들이 한 일은 악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악하게 의도한 일을 하나님은 선을 위해 뜻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음 주에 볼 50장에서 더욱 분명히 나옵니다. 여기 5절에서 8절에서는 그 뜻을 일부 보여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자신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2년이 되었고, 앞으로도 5년 동안 밭을 갈거나 거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보내셔서 이 땅에 형제들의 후손이 남게 하시고 큰 구원으로 그들의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곳에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의 하나님 이해가 얼마나 분명한지 보십시오.
“당신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잘못까지도 자신의 큰 구속계획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사용하십니다.”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보다 더 악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난 가장 사악한 일까지도 우리를 위한 선을 이루시는 주권적인 뜻 안에 포함시키실 수 있습니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가 그 뜻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대개는 아닙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그 악의 피해자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만이 아니라 창세기 45장에서도 그것을 봅니다. 여기서는 그 선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지금 당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보십시오. 나는 흉년이 올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이제 겨우 2년이 지났고 5년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흉년을 통해 형제들을 요셉 앞으로 오게 하셔서 화해의 길을 여셨습니다.
흉년은 그들의 고향 가나안 약속의 땅까지 덮쳐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식량을 쌓아둘 수 있는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형제들이 그의 문 앞에 섰을 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안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이 상실만은 사용하실 수 없을 거야. 내가 잃은 것 잃은 사람을 돌려주실 수는 없어. 이 빈자리를 이 상처를 고칠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일까지도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을 볼 눈과 관점이 없을 뿐입니다. 언젠가 이 모든 일의 저편에 서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온전히 돌아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그 일까지 사용하셨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삶의 일들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엮고 계셨는지 알게 되면 경이로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정보는 작은 상자 안에 든 몇 개의 점과 같습니다.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또 하나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모든 점을 알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분이 보여주실 것이고 우리는 가장 어두워 보이던 때에도 “아, 하나님은 선하셨구나” 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 진리를 작은 규모로 미리 봅니다. 이제 남은 절을 살펴봅시다. 9절에서 15절을 보겠습니다. 서둘러 아버지께 올라가서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한다고 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온 애굽의 주인으로 세우셨으니 지체하지 말고 내게 내려오십시오. 고센땅에 사시면 아버지와 자녀들, 손자들, 양떼와 소떼와 모든 소유가 내 가까이에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 아직 5년이나 남았으니 아버지와 온 집안이 가난해지지 않도록 제가 거기서 부양하겠습니다. 보십시오. 당신들과 내 동생 베냐민이 보는 대로 지금 내 입으로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영광과 당신들이 본 것을 아버지께 전하고 서둘러 아버지를 이곳으로 모셔 오십시오 그리고 요셉은 동생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고 베냐민도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입맞추며 울었고 그제야 형제들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밀린 이야기가 참 많았겠죠. 이 마지막 절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요셉이 베푼 용서의 크기입니다. 그는 “용서해야 하니까 용서합니다. 하지만 이제 내 눈앞에서는 사라지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로서 “용서하지만 지금은 네 얼굴을 못 보겠다”라고 말해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 “용서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요? 그런 용서는 여전히 상대에게 벌을 주는 용서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만 당분간 보고 싶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가까이 오지도 마십시오”라는 말이니까요. 물론 심각한 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안전을 지키고 신뢰를 다시 세울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 용서했으니 이제 짐을 챙겨 돌아가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을 애굽 북쪽으로 돌려보내거나 나일강변 어딘가 먼 곳에 살게 하면서 가끔 배를 타고 지나가다 손이나 흔들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팔을 뻗어 거리를 두는 용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용서를 잘합니다. 입으로는 환하게 웃으며 “용서합니다”라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상대를 멀리 밀어내는 경우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죠. 그런데 요셉의 용서를 보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내 가까이에 살기를 바랍니다.” 좋은 땅 고센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자신이 마련해 주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함께 지내자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계속 이야기를 나눕니다. 요셉의 용서는 “하나님, 제가 용서하라는 명령을 지켰습니다” 하고 하늘나라 여권에 도장 하나 받으려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 뒤로도 형제들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맺으며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복음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역한 하나님,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지만 우리가 온갖 방식으로 어긴 하나님, 우리가 거의 하루도 숨쉬는 순간조차도 죄 없이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거듭 심각하게 죄를 지었고 내일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함께 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용서한 뒤에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 도착했는데 하나님이 거기까지 용서는 했으니 방 열쇠를 받으시오. 당신 방은 저 멀리 끝에 있습니다 라고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변두리의 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맞아들여집니다. 천사들조차 경외하는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담대하게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본문이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있기를 늘 원하셨습니다. 저 멀리 올림포스산 같은 곳에 홀로 앉아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상하고 죄 많은 사람들 여러분과 저 같은 비참한 죄인들 사이에 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거듭 크게 죄를 지을 때에도 하나님은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장막 곧 천막 안에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 뒤에는 성전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했어도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셉도 형제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시는 갈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졌고 변화가 일어났으니 이제 한 가족으로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여러분 이것이 오늘 아침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복음의 약속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들의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까이 오라 이리 오라 하시며 우리를 품으실 뿐 아니라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영원히 너와 함께 거하고 싶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강도가 있었고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바라보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깨닫고 그분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간청합니다. “주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강도인 저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회가 어서 사라지기를 바라며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진실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단지 낙원에 들어갈 것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강도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천국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심을 받고 거듭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딸로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결코 쫓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고난과 상처의 아픔은 끝나고 모든 눈물은 씻길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용서받은 상태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